3. 1973년의 핀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며 '핀볼'이 핵심이다. 당시는 막 핀볼이 흥하던 시기로 사람들은 핀볼에 관심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나 는 핀볼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핀볼과 가상의 대화를 할 정도로 말이다. 집에서는 쌍둥이 자매와 동거하고 있었다. 핀볼과 대화하며 쌍둥이 자매와 동거하는 나의 모습은 제 3 자가 보면 상당히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쌍둥이조차 정상적인 이들이 아닌, 길거리에서 떠돌며 아무 집에 들어가 제 집인 것처럼 생활하는 기이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보니 냉랭함만 남아있던 집에 처음 보는 여자 둘이 있었고 그들은 티셔츠의 숫자가 없다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쌍둥이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거리를 떠도는 이들인 만큼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과거는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여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과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바로 '배전공'의 등장과 함께. 배전공은 배전반을 손보러 왔다가 나와 쌍둥이가 함께 있던 흔적을 발견하며 긴장한다. 쌍둥이가 그에게 배전반을 물었을 때 그의 대답과 뒤에 나올 쌍둥이의 반응은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전화 회선이 몇 개나 거기에 모여 있어요. , 어미 개 한 마리 있고 그 품에 강아지 몇 마리나 있는 셈이죠. 그래서 어미 개가 강아지를 기르는겁니다. 하지만 어미 개가 죽으면 강아지들도 죽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 새 어미로 갈아주려고 하는거죠. ”

 

죽어가고 있어요. 배전반이...”

 

장례식. 배전반의... ”

 

배전반을 어미 개에 비유하고 그에 대한 쌍둥이의 반응은 소름 돋기까지 한다. 그것도 배전반의 의미인 어머니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배전반은 죽어가고 있다고 하며 책의 마지막에는 배전반을 들고 아마 그들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을 저수지로 그것을 던져버린다. 이로 미루어 보아 쌍둥이가 길거리에 떠돌기 시작한 원인은 어머니의 부재, 혹은 마찰일 것이다. 장례식이란 단어를 보고 그들의 어머니가 죽었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전 죽어가고 있다.’ 라는 말을 한 것을 보아 그 당시에는 죽지 않았을 터인데, 어떤 근거로 쌍둥이가 어머니와 마찰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배전반, 즉 어머니를 마주한다는 각오를 보였다. 이는 어머니와 헤어지기 전에 결코 평탄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내가 쌍둥이를 아무 이유 없이 받아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각한다. 이전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방황하던 자신과 그들의 모습을 오버랩 해서 생각한 것은 아닐까. 공허로 채워져 있던 자신이 비워지듯 쌍둥이의 공허를 공감하고 케어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쌍둥이를 거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일과를 마친 후 쥐와 제이스 바에 모여 맥주를 마신다. 거기에 핀볼 기계가 있는데 나는 처음에는 그것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난 후 핀볼에 빠져 매일 같이 핀볼 기계에 돈을 밀어 넣는 나를 발견했다. 일과를 마친 후 어두운 게임방에 들어가 기계같이, 의미 없이 고득점을 노리며 핀볼에 빠져 살았다. 오죽하면 핀볼과 대화를 하고 있을 정도일까. 핀볼의 칭호는 원래 모델명인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쉽은 집어치우고 그녀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게임기를 사람과 동일시 할까. 그만큼 핀볼에 빠져있다는, 아니 홀려 있다는 말이다. 시간이 흘러 핀볼 기계가 사라지자 나는 핀볼에 일조가 있는 자칭 스페인 강사를 만나 핀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핀볼. 도대체 그 기계가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나 미치게 하는걸까. 작품 마지막에 핀볼 수집가에게 안내 받은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수많은 핀볼을 맞이한다. 하지만 연식 있는 기계들은 바로 지나쳐버리고 오로지 쓰리 플리퍼 스페이스쉽’, ‘그녀를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 그녀와 만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헤어진다. 짧은 만남이었고, 나는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를 하고 기억 속에 묻는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 전 스페인어 강사와 한 대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잃을 게 없잖아. ”

언젠가 잃을 것에 대단한 의미는 없다. 잃어야만 할 것의 영광은 진정한 영광이 아니야”,

이 세상에 잃어지지 않는 게 있나요?”

있다고 믿어. 너도 믿는 편이 좋을 거야” 

어쩌면 너무 낙관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야”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반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잃을 게 없다는 대답. 그에 따라오는 언젠가 잃을 것에 대단한 의미는 없다. 잃어야만 할 것의 영광은 진정한 영광이 아니야.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다. 그 목표에 의미를 가지고 그에 따르는 영광을 좆는다. 하지만 위에서 스페인어 강사는 말한다. 언젠가 잃을 것에 대단한 의미는 없다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극단적인 의견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매사에 이익을 바라고 행동을 취한다면 사람은 확실하게 이익이 보장된 행동만 취해야 한다. 하지만 보장된 성공은 신 외에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인간은 아무런 발전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꾸준히 발전해왔다. 이는 위의 대사를 반증해준다. 물론 지금의 해석이 오히려 극단적인 해석일 수 있다. 평범하게 보자면 잃어버리지 않게 노력하며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핀볼을 찾아다니고 그를 본 스페인어 강사는 나에게 조언을 해주며 그와의 만남을 마친다. 나는 당시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인지한 상태이고 강사는 잃을 것이 없는 그에게 희망의 말을 전하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없는 그는 앞으로의 행동에 희망을 남겨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기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라는 의미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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